영류왕에 대한 옹호
영류왕이 초기 노선을 소극적 입장을 취한 것은 기본적으로 다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고수전쟁이 대규모로 4차에 걸쳐 무려 16년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최대 격전이었던 2차 고수전쟁에서는 그야말로 고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군대를 맞아 국운을 걸고 싸웠다. 비록 고구려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고구려의 기본 전략인 청야전술의 가장 큰 치명적 단점이 바로 전후 기반을 닦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침공군이 운영할수 있는 모든 걸 파괴하는 작전이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국력 손실이 클 수 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고구려의 주요 인구+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 중 하나인 요동과 평양 일대에서의 격전은 분명히 고구려의 경제에 타격을 줄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로서도 국력차이가 5배 이상은 차이가 나는 중국의 통일 왕조를 상대로 힘든 전투를 치를 수 밖에 없었기에 국력적 한계 역시 충분히 절감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영류왕이 초기에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조치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자 동시에 꽤 현명한 판단이었다.
더욱이 당은 내부적으로 반란의 연속과 돌궐의 침략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 입장을 보인건 결국 상대적으로 고수전쟁에 대한 상호 적대심이 강한 상황에서 대등한 입장에서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수 있는 기반이었다.
더욱이 떨어진 국력에 대비하여 돌궐 세력의 성장은 위협으로 고구려에게도 비추어졌기 때문에 당을 이용하여 돌궐을 견제하면서 고구려의 힘은 들이지 않는 전략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 고조역시 국내 사정과 국외적 입장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점이 결국 각자의 이익에 서로 부합하여 충분히 상호 온건노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로서는 당을 적대하여 다시 자국 영토와 간접 지배 지역을 포함한 영향력 지역에서 일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흔히 환빠들은 서토공격을 할수 있었던 시기 운운하지만 고구려에게 난하 서쪽은 그저 고구려의 천하관과는 무관한 다른 천하관과 문화가 존재하는 서쪽 땅 일뿐이었고 당으로서도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여 서북~동북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고립되고 내부적으로는 혼란의 연속에 따르는 국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동양의 고대 국제 정치학적인 입장의 책봉과 조공 문제는 별 탈이 없었고 포로 교환이나 반환 역시 그렇게 무리될 것이 아니었다.
영류왕이 보낸 포로들만 하더라도 순차적으로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내부 복구에 그들을 투입하면서 노비로 활용할 것은 활용하고 쓸모없는 포로들 위주로 보냈을 확률이 높다.
즉 영류왕의 초기 온건 외교 노선은 고구려 스스로가 자국의 생존과 국력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물론 당 고조와 다르게 당 태종이 집권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긴 했다.
당도 내부적으로 안정되고 국력을 신장할 때였고 고구려 역시 왠만한 전후 복구를 다하고 국력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 태종의 봉역도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것은 당 태종의 집권이후 고구려에 대한 당의 외 교노선이 변화한 것에 대해 고구려 역시 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평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결국 영토를 분명히 하여 당으로 하여금 특정선 이상은 쳐들어 오지 말 것의 입장이 고구려에게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명분상 고구려가 당에게 자국의 영토를 바치는 모양새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주의에 빠져있는 중국 왕조들의 전형적인 자기 변호에 지나지 않다.
더욱이 당 태종의 이러한 문제로 고구려에서도 천리장성을 수축하는 형태를 작용하여 나름의 고구려로서는 서부전선인 당과의 전선을 정비하는 노력을 하였다.
이는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할때까지 고구려의 서부방벽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천리장성의 수축형태로 고수전쟁때와 다르게 당은 요동방어선에서 지상군이 번번히 돌파를 하지 못하고 묶여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결국 당이 선택한 전략은 요동방어선은 우회하는 선택을 하였고 그 전략이 통용된게 바로 3차 고당전쟁때 이다.
따라서 영류왕의 방어전선 구축은 당태종의 이러한 호전적 성격과 고구려 내부의 나름을 방어전략을 구축하는 일이 되었다고 볼수 있다.
게다가 당태종과의 전쟁을 치루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의 요청을 거부한 것 역시 고구려로서는 돌궐자체를 믿지 않았다. 고구려와 돌궐의 만남만 하더라도 전쟁으로 고구려가 돌궐을 격퇴하는 입장이었다. 평원왕 시절은 555년 돌궐은 유연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로 쳐들어왔고 이에 장수 고흘(高紇)을 보내어 격퇴하고 일부세력을 복속시켰다.게다가 고수전쟁때에는 돌궐이 고구려의 집단 예민(集團隷民)에 있던 거란을 치며 수나라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전례가 있는 돌궐을 과연 고구려가 쉽게 신뢰하여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세력이 고구려의 북방까지 넓히고 있는 돌궐을 당시 영류왕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을리도 없었다. 더욱이 고구려로서도 당시에는 천리장성에 국력을 쏟아붓고 있었고 남방인 신라와의 전선에서의 국지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통일왕조인 당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북방이민족들과의 균형외교는 하지를 못했다.
이는 동돌궐이 멸망하는것을 무조건 방조한 결과에서 북방 이민족들의 친고구려 성향의 이탈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영류왕의 경관(京觀)을 파괴요구와 직방낙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의 고구려 정탐 묵인과 태자 고환권의 입조는 영류왕의 노선변화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신라와의 국지전 소모에 대한 입장도 고구려로서는 신라에게 빼앗긴 옛땅의 수복도 중요하지만 어느정도 방어전선의 안정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중국왕조들이 있는 요동과 요서에 해당하는 고구려에게는 서부전선의 방어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서부전선의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안전하다 싶으면 그때서야 남부전선인 한반도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성과를 냈었고 이는 장수왕-문자명왕때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류왕 시기의 서부전선은 천리장성 수축이 필요하고 동시에 외교로서 최대한 교란이나 균형을 유지할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중국은 사분오열된것이 아니라 통일왕조인 당이 들어서면서 안정을 찾고 국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쉽게 남부전선에 투자할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는 천리장성의 구축만 16년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오랜시간 지속 했었던 점만 보더라도 알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한반도 전선의 신라의 방어선을 나름 구축하고 교두보 발판으로 칠죽성 공격과 같은 노력을 한건 결국 내려는 가겠지만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봐야한다.
이러한 외치문제를 제외하고도 내부적으로 고구려는 평원왕의 중흥이후로 영양왕과 영류왕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강력한 왕권을 다시 세울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왕권의 강화와 귀족세력들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중요했다. 특히 장수왕의 천도이후 평양에서 부흥한 신진귀족세력과 국내성을 중심으로의 전통귀족세력이나 북방의 귀족세력등의 여러가지로 얽혀있는 귀족세력들의 권력균형을 맞추어야하는 일을 영류왕도 한 것이다.
그런 정치술에서 연개소문의 가문이 활용되는 과정이었다고 봐야한다.
흔히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있었다고하지만 정치라는게 그렇게 쉽게 편가름을 하기 어려운 점과 상호이익에 움직이는 점을 본다면 왕이 균형을 맞추고자한 것이고 영류왕은 그것을 24년동안 집권하면서 나름 수행한 것이라 봐야한다.
물론 영류왕은 집권 중반 이후부터는 어느 왕도 마찬가지지만 한쪽으로 편승한 입장의 정치노선을 보이는 과정을 택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친위쿠데타이든지 아니면 정변이든지 어떤 방식으로의 무장봉기와 충돌을 발생시킨 것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그것은 영류왕의 균형정치가 실패한 것이자 다시 고구려의 정치체제가 왕권 중심이 아닌 귀족연합체 성격으로 다시 전환됨과 동시에 독재체제를 확립하게 한 것임에는 틀림은 없다.
추가적인 영류왕의 옹호론적인 재평가 문제는 이곳에서 확인해볼수 있다.
4.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하다
왕위에 오른지 24년이 지난 642년 10월, 고구려 정계내 권력 균형 문제로 너무 과도하게 힘을 키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시해당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시체를 다섯갈래로 나눠 구덩이에 넣었다고 한다.이것이 나중에 전쟁의 명분이 된다.
하지만 이는 헛소문일 가능성도 있다.
영류산에 매장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영류라는 시호가 영류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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