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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딘의 역사

팔라딘의 역사


'팔라딘'이라는 말의 어원은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palatinus)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종전 로마 제국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체한 후

전설속에서 로마의 최초 건설지로 알려진 이 언덕의 이름을 따서, 

친위기병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Scholae Palatine)에게 붙인 명칭에서 유래한다.[1] 



이후 프랑크 왕국이 로마 교황에 의해 새로운 서로마로 선포되자 프랑크의 국왕직속 기병대원들에게 

이러한 명칭이 사용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대 유명한 기병전사들의 무훈을 기리는 

롤랑의 노래 등에 등장하는 샤를마뉴의 12기사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궁정에서 기거하며 왕을 수호했기 때문에, 이것이 팔라딘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현재도 이 단어는 이것에 근거해 궁정 기사라는 뜻으로 간혹 쓰이기도 한다.



이후 프랑크에 이어 새로운 서로마 제국으로 불리게 된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프랑스 등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 왕이나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궁정 기사와, 그리고 교회를 수호하는 고위 기사 및 귀족들에게 팔라딘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특히 로마 교황청에서는 수도사가 아닌 일반 신도 기사중에 교황의 명을 받아 교황청을 수비하거나 재판을 실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즉, 이단심문관-인퀴지터- 역시 상당수는 팔라딘이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서 19세기까지 공적이 많은 이들에게 명예로운 호칭으로 팔라딘의 칭호가 내렸고,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때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 헤르만 괴링도 히틀러로부터 팔라딘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다시 교황청으로 돌아와서, 유럽의 봉건적 신분 제도가 무너지고 교황의 힘이 점차 약해지면서 교황령 자체가 줄어들었고, 따라서 팔라딘들의 권한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르네상스 이후 전술의 변화로 기병보다 보병이 중시되어 교황청의 실질적인 방위를 담당하는 주력이 스위스 용병으로 바뀌면서 팔라딘의 필요성 자체가 점차 줄었다.



하지만, 팔라딘 조직 자체는 평신도로 이루어진 군사조직으로 교황청의 방위를 담당하는 한 축으로 계속 존재했으며, 2차대전 무렵 교황을 무시하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교황청의 독립성을 무시하고 합병을 시도했을 때, 팔라딘들은 스위스 용병들과 함께 총포로 무장하고 교황청을 포위한 이탈리아군과 대치했으며, 이들의 죽음을 각오한 기세와 국제 여론의 악화, 국내 가톨릭 신도들의 반발로 무솔리니가 꼬리를 내리는 것데꿀멍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되기도 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교황청의 예산문제와 대외적으로 평화주의를 내거는 현대 가톨릭의 이미지상 군사조직의 보유 필요성도 적어졌고, 이탈리아의 침공위협 자체가 사라지고, 교황령이 팔라딘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킬 공간상의 여건이 안 되는 등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