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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영락제의 조선과의 관계가 궁금했다..

명나라 제3대 황제.영락제

이름은 주체(朱棣).

태조 주원장의 4남. 


명군이지만 동시에 폭군이었던 인물이다.

게다가 환관들을 너무 중용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영락없는 황제 이 사람의 사상을 주체사상이라 한다.




여태껏 취한 행보랑 달리 

생긴건 이웃집아저씨같이 생겼다 

왜 희대의 범죄자들 보면은 다 이웃집 아저씨, 

순수한 청년처럼 생겼잖아 그거하고 비슷한 이치야.. 


1370년 11세 때 연왕(燕王)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으나 

바로 이 때 북쪽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진짜로 북경 지역으로 간 것은 1380년, 21세 때였다. 

이 때 이후로 그 지역의 정치와 군사를 총괄했다


당시로써는 명나라의 최북방 지역으로

주원장의 북진으로 인해 북방으로 물러간

몽골족의 침입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를 막아냈다.

그런 만큼 무골로 성장했고 

성품도 대단히 호방하고 목표의식이 뚜렷했다.

이런 능력 때문에 주원장은

그를 내심 후계자로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장남(막내아님)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고, 

주표가 일찍 죽자 그 아들인 주윤문(훗날의 건문제)을

황태손으로 삼았다.








암튼... 영락제조선과의 관계가 궁금했다..


그의 치세는 

조선의 태종(1400~1418) 시대와 거의 겹치며

세종(1418~1450)의 재위 초반과 겹친다.

영락제는 개인적으로는 조선 여인을 좋아했는지 

총 8명의 공녀가 그의 후궁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 영락제는 주원장의 정처 소생이 아니라 

조선의 여인 소생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영락제가 태어날 1360년은 아버지 주원장은

황제도 아닌 강남의 유력 군벌 중 하나였을 뿐이고

또한 영락제에게 황위를 찬탈당한 

건문제를 추종한 세력들이 지어낸 루머일 수도 있다.


그 외에 실록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음식과 술도 입맛에 맞았던지 

그 재능이 있는 궁인도 보내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명으로 건너간 공녀들은 각각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그 중 한 명인 

권씨가 현인비로 봉해졌고,

한영성의 딸이자 

한확의 누나인 한씨는

여비로 봉해서 총애를 받았다.

이 중 현인비 권씨는 

상당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영락제의 황후 서씨가 죽은 뒤였는지라

후궁의 관할을 조선에서 온지 얼마 안되는 권씨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되어 병사했는데 

후에 그 죽음을 둘러싸고 어여의 난이 일어나 

엄청난 수가 죽게 된다.


한편 같이 갔던 황하신의 딸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국을 우습게 본 거냐고 노발대발하는 영락제를 

한씨가 여염의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알았겠냐고 말렸는데

그 말에 감동한 영락제가 황씨에 대한 처벌을

그녀에게 맡기자 한씨는 황씨에게 뺨을 때렸다고 한다.


후에 영락제 묘에 순장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일부 한국인들 사이에선 감정이 좋지 않기도 하지만, 


사실 조선 태종이 겉으로라도 명에 대해 저자세로 나온 대가로 

조선에 엄청난 무역특혜를 제공했다.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국가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내리는데,

태종은 이를 이용해 파격적인 실익을 얻어낸 것이다.


태종:내가 저자세로 나왔던것은 조공특혜를 얻기 위함이었다


당시 명은 조선과 베트남 그리고 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명은 태종이 친명노선을 천명하자 

파격적으로 1년에 3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그 후에 명나라는 수시로 조공무역을 줄이자며 

조선에 요청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우리 국토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세웠고, 

재위기간 내내 이 방침을 고수했다.

특히 명이 조선의 동북지역까지 살고 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명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심지어는 마지막에 

"폐하 아버지께서도 이건 인정한 거니까 태클 걸지 마셈."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결국 동북지역 여진족을 

계속 조선이 관리하라는 말을 받아냈다.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북방 국경의 방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많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저 저자세로만 나가지는 않은 것이다.

이 상황은 영락제 치세를 살았던 

세종대왕대에도 더욱 강력한 대여진 정책과 함께 그대로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