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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의 인물됨과 일화


영락제의 인물됨과 일화



혈족과의 권력 다툼과 그 끝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번영시킨 명군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


조선의 태종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동시대에 살았던 조선 태종과는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고.


태종이 왕자 시절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연왕으로 있던 영락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조선에 돌아와서 태종은

"연왕은 왕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태종이 간파한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태종도 정변으로 즉위했고 영락제 본인도

정변으로 즉위해서 그랬는지,

태종을 완전한 조선 국왕으로 인정해 준 것도 영락제였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둘은 참 궁합이 잘 맞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이 직접 영락제에게 보낼 말을 골랐는데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해보이는 말을 골라서 바치라고 하니 

영문을 모른채 영락제 앞에 보냈더니 영락제가 매우 기뻐하면서

조선왕이 최고의 명마를 바쳤다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카를 페위한 부분은 세조와도 비슷해 보인다.


환관들의 도움으로 황제가 됐다는 이유로 환관들의 세력을 키워

나라의 국운을 약화시킨 것도 세조가

계유정난의 공신들을 토사구팽하지 않고

우대해 나라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한 것과 비슷하다.


베이징에서 약 44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인

명십삼릉(밍스싼링: 明十三陵)이라고 부르는데, 

그 중 영락제의 능인 장릉이 가장 규모가 크며 유명하다.


장릉보다 더 큰 능을 만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장릉의 전각인 능은전(裬恩殿)은 

자금성의 태화전에 맞먹는 규모이며,

태화전과 함께 중국 최대의 목조건축이다. 


기린이 동양권에 알려지게 된 시기 또한 영락제 때.

그 기린 덕분에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효과도 있었다.


십족을 멸한다는 말을 만든 장본인으로 정난의 변 과정에서 

방효유의 십족을 멸족시킨 적이 있다. 

원래 구족이라는 개념은 있어도 십족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런데 건문제의 측근으로서 

연왕(즉 영락제)를 제거하려 한

방효유를 회유하여 

즉위 조서를 쓰라고 했을 때 

방효유가 이를 거부하며 오히려 

연적찬위(燕賊纂位: 연나라의 역적이 제위를 찬탈하다)라고 쓰자


화가 난 영락제가

 "너의 죄가 구족에 미치더라도 계속 고집을 부리겠는가?"라고 했고,

이에 방효유가

 "구족이 아닌 십족을 멸족시킨다고 해도 내 뜻을 꺾을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전무후무한 십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이는 구족에 친구와 문하생을 포함시킨 것. 

방효유의 '십족'으로서 총 847명이 처형되었다고 하며, 

이들은 모두 방효유의 눈앞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을 정복한 티무르가 명과의 결전을 준비한 것이

1404년의 일로 영락제는 1402년에 찬탈하고 

황제로 즉위했으니 

막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영락제와 

정복의 막바지에 이른 티무르의 군세가 

격돌할 위험이었으나 

티무르는 1405년 병사, 당대 최강을 다투는 

양 제국의 대결전은 성사되지 않았다.